Twisted illusion
라벤더 안개와 잿빛도시 본문
- 실락원(@LeParadis_Perdu)님 글 커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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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마셸은 길고 긴 악몽 속을 걷고 있었다.
마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더는 꿈도 신비도 마법도 존재하지 않는 딱딱하고 단조롭고 지루 한 미래. 환상과 몽상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옛것이 되어버린, 그곳은 이성과 논리가 지배권을 쥔 잿빛 세계였다. 높은 마천루가 빽빽이 솟아 있고 거리는 풀포기 하나 찾아보기 어렵게 틈 하나 없이 꼼꼼히 회색 돌들로 포장된 이상한 도시였다. 마셸이 꿈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 도시는 마셸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은 쥐처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케케묵은 시대의 옷을 입고 구시대의 행색을 한 마셸을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바쁘게 거리를 지나갔다. 마셸은 흐린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줄들을 바라보고 걸었다. 줄들은 서로 엮여 있기도 했고 긴 기둥에 묶여 있기도 했다. 꼭 드림 캐처의 실들 같은 모양이었다.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걷다 보니 말없이 달리는, 바퀴가 넷씩 달린 마차들이 그녀의 뒤에서 계속 큰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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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마셸은 거리 한구석에 주저앉아 쇠기둥에 등을 기댔다. 기둥은 위에 램프가 달려 있어 그녀가 아는 가로등과 비슷한 형태였지만 그 모양은 훨씬 미래적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그 옆에 앉아 있던 남루한 행색의 노파는 겉옷 아래 파묻은 얼굴을 들고 와락 짜증을 냈다. 이봐, 여긴 내 자리야! 마셸이 차지하고 앉은 그 자리가 걸인들 사이에서도 소위 명당이라고 불리는 자리인 모양이었다. 마셸은 노파의 항의를 모른 체 하고 신발을 벗어 욱신거리는 발을 주물렀다. 그녀가 대꾸도 하지 않자 노파는 투덜거리면서 다시 푹신한 겉옷 아래 얼굴을 묻었다. 노파의 해진 치마는 마셸의 것만큼이나 구식인 디자인에 오래된 재봉 방식으로 지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망연한 표정으로 커다랗고 차가운 등불 아래 앉아 있으니 그녀도 노파처럼 걸인이거나 백치라고 생각하고 동전을 던져주는 이들도 가끔 있었다. 마셸은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반가웠다. 이렇게 삭막한 도시에도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의 자비를 베푸는 풍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라도 자신을 아는 체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동전이 한 손에 꽉 차게 쥐일 정도로 모였을 때 마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고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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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막한 꿈에서는 마셸은 늘 그녀의 마녀를 찾았다. 이드라는 꿈 그 자체의 주인이었고, 마셸이 꾸는 모든 꿈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괴로운 악몽 따위는 깃털을 입으로 훅 불어 날리듯이 쉽게 떼내어 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마셸은 마녀라고는 흔적도 보이지 않을 것처럼 공허하고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마녀를 찾으면, 마녀님이 나타나줄까? 마셸은 마녀가 개입하지 못할 꿈은 없다고 믿었다. 이드라가 그녀에게 주는 모든 꿈은 이드라의 힘과 깊게 얽혀 있었다. 그러니 마셸이 어떤 꿈을 꾸더라도 그 안에는 신비가 있고, 환상이 있고, 막연한 마법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그러했다. 그러나 이 꿈은...
아예 이드라의 존재를 배제한 세상 같지 않은가. 그녀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 마녀가 힘을 쓸 수 없는 세상. 어쩌면 마녀 같은 신성한 존재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묻힌.
마셸은 자신의 머릿속을 스친 불경한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럴 리 없다. 태곳적부터 사람들은 꿈을 꾸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탈혼의 시간은 사람들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드라의 본거지인 꿈의 제국은 한낱 사람들이 거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좋든 나쁘든 누구나 공평하게 향유하는 곳이었다. 천 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꿈을 꿀 것이다. 그러니 이곳의 사람들도, 꿈을, 몽환을, 마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마셸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려 했지만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떨리는 입술로 이드라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에는 들리지도 않을만큼 작게, 그러나 점점 용감해지고 절박해진 까닭에 한 번씩 다시 부를 때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마녀님, 이드라 님, 나의 마녀님!
높다란 건물의 창문이 거칠게 홱 열리고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람은 계시처럼 나타난 것에 비해 턱없이 짜증나고 성마른 음성으로 저 아래에 있는 마셸을 향해 욕설을 퍼붓더니 도로 창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와의 거리가 꽤 멀어 모든 단어가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추정컨대, 미친 여자야, 이 오밤중에 마녀인지 뭔지 찾지 말고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 정도의 말이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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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셸은 얼이 빠진 눈으로 불이 밝혀진 건물들을 올려다 보았다. 저렇게 높은 탑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가 마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여기는 꿈이다. 여기는 이드라의 영역이다. 꿈 속의 주민들은 모두 이드라의 지배 하에 있는 마녀의 신민들이다. 그들은 모두 이드라가 말 한마디로 지울 수도 있고 창조할 수도 있는 그림자, 허깨비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감히 꿈 속의 주민이 제 앞에서 대놓고 이드라를 모욕하다니.
마셸은 갑갑하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꿈이다. 꿈이 아니 면 안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이 갑자기 내 현실을 대체하게 될 리 없다. 하늘은 밤처럼 어두운데 거리는 대낮처럼 환한 이런 미친 곳은 꿈으로 끝나야 한다. 거리를 걷는 여자들은 죄다 속옷처럼 짧은 치마를 입었고, 꽃 같은 분홍빛이나 초목 같은 녹색 머리를 한 사람들도 몇 명이 나 있었고, 특이하게 생긴 기계를 머리에 쓰거나 손에 든 남자들도 있었다. 이런 이상한 세계가 현실일 리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녀는 잘못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깊숙한 곳에서는 질이 나빠 보이는 무리가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담배를 피우며 더러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화장을 짙게 한 어린 여자애도 있고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남자애들도 있었다. 마셸은 그들이 내뿜는 연기의 냄새를 맡고 어딘가 그립고 익숙한 향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가 가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드라와 접신하기 위해 태웠던 약초의 향기였다. 마셸은 어쩌면 그들이 마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드라 님을 아니? 아이들은 감히 이 골목에서 자신들을 방해할 만큼 간 큰 여자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낄낄거렸다. 마셸은 그들 앞에서 대답을 듣기 위해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키가 큰 여자애가 마셸의 코앞에 대마 연기를 훅 내뿜으면서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녀들은 백 년도 전에 화형대 위에서 다 죽었어. 여긴 그녀들의 재와 뼈 위에 세워진 도시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째질 듯한 목소리로 웃었다. 마셸은 예기치못하게 들이마신 연기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다. 목이 맵고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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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기는 악몽이야, 그녀가 체념하고 단정지으려던 순간 마셸의 머리를 칼날처럼 스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마셸은 무리에게 ‘이드라’를 아느냐고 물었지 ‘마녀’를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키 큰 여자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적어도 그 여자애만큼은 이드라가 곧 마녀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셸은 더럭 손을 뻗어 불붙은 꽁초를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붙들었다. 마셸은 떨리는 눈과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지? 나의 이드라 님이 마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 지? 이 고독하고 외로운 여신의 숨겨진 이름을 어디에서 알아냈지?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마셸의 말마디에 여자애는 잠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자는 푹 눌러써서 머리를 가렸던 후드를 벗고 한밤중에도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단정치 못하게 삐죽삐죽 잘린 백발과 아몬드 모양의 녹색 눈. 그것은 ‘꿈 속의 마셸’이었다.
안녕, 우린 구면이지?
흰 머리 마셸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마셸은 눈에 힘을 주어 그녀를 노려보았다. 꿈 속의 마셸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내밀었던 손을 자연스레 거두었다. 어느 새 그녀들 주위에 서 있던 무리들은 눈으로 빚은 조각이 태양빛 아래서 사라지듯 녹아 없어져 있었다.
또 너야? 마셸은 짜증난 투로 쏘아붙였다. 비록 저번의 조우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녀는 마셸에게 어느 정도의 호의를 베풀었다. 마셸이 그녀의 뜻을, 그리고 여신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해도 호의는 호의인 법. 거절하거나 매몰차게 등을 보일 수도 없는 상황이 마셸은 몹시 불쾌했다. 자, 그러지 말고. 우리 마녀님께 가자. 흰 머리의 마셸은 마셸을 어떻게 달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도 마셸이었으니까. 꿈 속의 마셸은 다정스럽게 꿈 밖의 마셸의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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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구불구불하고 좁은 미로 도시의 골목들을 헤매며 올바른 길을 찾아나갔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미래의 문물들에 대한 설명들을 마셸에게 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은 까닭에 마셸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거의 혼이 빠져 있을 지경이었다. 그녀들의 목적지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호텔이었다. 정말로 이곳에 마녀님이 계신 게 맞아? 마셸은 의문스럽게 되물었고 흰 머리의 마셸은 정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는 계단에 몸을 싣고 탑 높은 곳에 위치한 마녀의 방까지 올라갔다. 마녀의 방은 호텔의 다른 방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문과 벽 안에 감춰져 있었다. 거기가 이드라의 은신처라는 흔적은 문 위에 늘어진 보랏빛 휘장과 <999호>라고 쓰인 팻말이 다였다.
왜 그분께 이런 비밀스럽고, 배타적이고, 불신자들로 가득찬 이상한 도시가 필요했을까?
마지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뒤를 돌아 떠나려던 흰 머리의 마셸은 답을 확신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마주 갸웃거렸다.
우선은 첫째로, 이 또한 사람들의 꿈이기 때문이고. 아마도 둘째로, 그분은 신이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숭배를 받는 삶이라는 건 꽤 피곤한가 봐. 그래서 이런 도시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이성과 합리의 유토피아를 마련함과 동시에 신이 신 외의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드셨대.
마셸은 불만족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난 이해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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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호텔 방의 문을 열자 안은 온통 라벤더빛 안개로 자욱한 공간이었다. 호텔이라고 하면 양탄자가 깔린 바닥, 잘 정돈된 침대, 거울, 짐을 수납할 벽장 따위를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방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물처럼 짙은 안개들이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드럽게 솟아오르다가 다시 안개들의 흐름에 쏟아져내려 합류하기를 반복했다.
마녀님? 마셸은 안개들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어둑한 방은 저 거리에서 빛나는 차갑고 눈부신 조명 불빛들이 전혀 침범하지 못하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나른한 음악 같은 답변이 안개 속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아가, 이리 좀 더 가까이 오렴.
마셸은 발 디딜 곳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면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허청허청 걸어갔다. 바닥은 끝이 없는 안개를 쌓아 만든 것처럼 부드럽고 푹신하면서도 위태로웠다. 방 곳곳에서 연보랏빛 연기들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이드라는 그 연무를 수 겹의 베일 삼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마셸은 마녀의 실루엣이 보일 만큼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가 문득 숨을 삼켰다. 이드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물처럼 짙은 라벤더빛 안개를 온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이드라는 아름다운 수정 빛 비늘이 돋은 팔을 뻗어 연막을 헤치고 마셸을 붙잡아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삽시간에 이드라의 팔 안에 갇힌 꼴이 된 마셸은 두려움과 어쩔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드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마셸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신이 신이 아닌 곳에서, 마녀가 마녀가 아닌 곳에서, 어쩌면 우리는 더욱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 이드라는 라벤더빛 안개에 무뎌진 날카로운 손톱으로 작고 여린 마셸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나직히 속삭였다.
자, 우리, 허울들은 모두 여기에 벗어 놓도록 하자. 지긋지긋한 규율이나 예의 같은 것은 이 안개 속에서는 잠깐 치워 놓는 거야. 이드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숨을 훅 불어 도넛 모양의 라벤 더 구름을 만들어냈다. 안대를 벗은 눈은 한 쌍의 잘 깎은 자수정처럼 번들거리며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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