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sted illusion

깨어서 꾸는 꿈 본문

Yidmarshall

깨어서 꾸는 꿈

마셸 2021. 8. 23. 18:00

- 실락원(@LeParadis_Perdu)님 글 커미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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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셸 로비사 리는 종종 꿈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의 꿈은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삼차원 미로와 같았다. 그곳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미로 혹은 미궁이기는 했지만, 그곳은 똑같은 벽과 똑같은 길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건축물은 아니었다. 그녀의 꿈은 울창한 숲이나, 거대한 괴물의 뱃속이나, 화려한 성의 대연회장이나, 파도가 치는 절벽 따위가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지형에 가까웠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장소가 마셸의 꿈 위로 돋아나고 웃자라며 뒤엉켰다. 여러 시공간이 겹겹이 몸을 겹치고 퇴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페이지든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곳을 책에 빗대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시작과 끝을 알아볼 수 없고, 위와 아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으며, 왼쪽도 오른쪽도 앞도 뒤도 가릴 수 없는 곳, 그곳은 우주의 모든 물리적 제약을 극복한 영원의 궁전이자 용감한 탐험가라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원초적인 낙원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으며 하룻밤에 단 하나의 얄팍하고 단조로운 꿈을 허락받는 것과는 달랐다. 그녀의 꿈은 드넓고 풍요로웠고 깊었으며 대개의 경우 마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마셸은 언제나 광활한 미로의 중심에서 눈을 떴으며 자신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미지의 영역을 탐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 인간이나 누릴 수 없는 귀한 특권이자 그녀의 여신 이드라가 특별히 베푸는 축복의 증거였다.

그러나 꿈속에 난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고, 그 길들이 모두 아름답고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꿈은 그녀의 신만큼이나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었으며 때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 길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서로 이어져 있거나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거나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망가져 있었으며, 가끔은 그녀가 여러 번 가 보아서 완벽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길마저 형태를 갑작스럽게 바꾸고는 했다. 그녀의 꿈은 어떤 방법으로도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 여우와 같았다. 마셸의 꿈은 그녀가 자신을 이해하고 굴복시키도록 두지 않았고, 그럴 때 그녀의 꿈은 그녀에게 한없이 적대적이었다.

  한낱 인간이 꿈속을 마음대로 유영할 수 있는 것과 그곳을 낱낱이 뜯어보며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마셸은 꿈을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인간들보다 아주 조금 앞서 있을 뿐이었다. 이드라가 나누어준 힘은 단지 그녀가 꿈속에서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며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미약한 수준이었다. 사람들이 태풍이 칠 것을 안다고 해서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마셸이 꿈속의 길을 안다고 해서 그 길을 안전하게 지나거나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마셸은 자신이 신의 권능을 나누어 받은 일에 단지 감사할 따름이었지만, 적응할 수도 굴복시킬 수도 없는 꿈과 씨름을 하다 보면 가끔은 모든 것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꿈에게, 그리고 자신과 꿈의 주인에게.

    

*

    

  종종 그녀는 자신의 마녀가, 자신의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꿈속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하염없이 울고는 했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일 때에는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울든 그녀의 신이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셸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혼란하게 뒤섞인 세상에서, 자신의 의식과 육신으로부터도 분리되어,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이 붙잡을 것 하나 없는 망망대해 위를 표류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깨어있을 때보다도 잠이 들어 있을 때 자신의 신이 더욱 멀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와 그녀의 신이 진정으로 합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오로지 그녀의 꿈속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마셸은 꿈속에서 마녀를 더욱 알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믿고 따르던 신과 그녀의 꿈에 대해 한층 강한 이질감을 덧칠하게 되었고, 어쩌면 마녀가 자신을 돕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마셸은 이드라가 자신과 자신의 꿈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여신이 자신과 꿈을 일부러 부딪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닭이나 개 따위를 서로 싸우게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를 점쳐보는 시골 농부들처럼, 귀뚜라미끼리 싸움을 붙이고 돈을 건다는 동방의 옛 귀족들처럼. 그녀는 가끔 자신이 마녀의 유흥거리로 소모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스스로도 자신이 감히 그런 불경한 의견을 떠올리는 것에 질겁하여 애써 눈을 돌리고는 했다.

  여신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마셸은 스스로 이드라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부여하여 그녀가 자신을 돕지 않은-혹은 돕지 못한 핑곗거리를 제공했다. 그녀의 여신은 한낱 인간의 악몽까지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 바빴을 수도 있고, 마침 그녀를 돕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마셸을 구하는 것이 여신의 큰 계획에는 어긋났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당장은 기분이 약간 나아졌지만, 그다음의 의문이-그것도 이번에는 스스로 상정하기조차 부끄럽고 무엄한 질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드라에게 아무것도 아닌 한낱 인간이었을까? 여신은 그녀의 꿈에 일일이 신경과 시간을 쓰지 않고, 그녀를 돕는 것보다 다른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그녀가 꿈속에서 울부짖든 말든 여신의 계획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말 그대로 스스로 품기에는 상당히 강한 자만을 바탕으로 자라나는 낯부끄러운 종류의 것이라, 마셸은 차라리 그녀의 신이 이 모든 상황을 손안에 놓고 빤히 들여다보면서 모든 것을 신의 의도대로 정확히 조작하고 있다고 믿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마녀는 마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면서도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방치와 의도된 고난의 증거였다. 자신의 신도가 꿈속에서 갖는 생각을 이드라가 모를 리 없었다. 여신은 주머니 속에 든 것들을 꺼내어 펼쳐보듯 마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꿈은 여신의 땅이었고, 꿈속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그녀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이드라가 마셸의 고난을 통제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린 말이었다. 여신은 마셸의 고난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녀가 처한 상황을 통제했다. 고난이 마셸을 완전히 꺾지 못할 정도로만, 꿈과 그녀의 신도가 비등하게 맞붙을 정도로만 난이도를 조정하는 것은, 마셸을 낱낱이 꿰고 있는 자애로운 이드라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 고도로 정교한 작업이었다. 이드라는 그녀의 딸이 황량한 숲에서, 어둡고 미끄러운 빗길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에서 울부짖는 것을 보았고 기꺼이 그녀의 눈물과 불안을 음미했다. 여신은 자신을 찾는 신도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나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애원하고, 갈구하고, 끝내 포기하고 체념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작은 머리로 무한한 신비의 변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신의 사랑이란 종종 그렇게 가혹한 면이 있었다.

    

*

    

  악몽을 한층 자주 꾸게 되고 나서부터 마셸은 일상생활에도 많은 지장을 느끼게 되었다. 눈 밑에는 짙푸른 그늘이 졌으며 자주 손을 떨었고 이드라 몰래-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으니 사실은 그저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인 것에 불과했지만-술잔을 기울였다. 마셸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고 가장 좋아하던 일에도 시큰둥한 낯을 했다.

  그녀는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거나 그렇게 보이기라도 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람이 피폐해져 가는 것은 생각보다 숨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고작 꿈일 뿐인 것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물으면 마셸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눈 뜨면 사라질 꿈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셸에게는 아니었다. 마셸에게는 꿈이 곧 고향이었고 영원한 종착지였다. 그녀는 잠 속에서 길러진 꿈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현실과 몽상이 똑같은 무게로 다가왔으며 가끔은 저울이 꿈 쪽으로 한껏 기울기도 했다. 꿈과 현실은-마치 사람들이 한쪽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낮과 밤이 사람의 인생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처럼, 그녀의 성장에 똑같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과 비현실 가운데 어느 것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둘 중 한쪽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녀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사랑과 신앙과 향수는 한 방향으로 날카롭게 쏠려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의 몽상이 시들어감을 깨달았을 때, 마셸이 거의 제정신을 잃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셸은 자신의 마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한낱 인간인 그녀의 의심이 여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그녀가 감히 신에게 의혹을 제기할 만큼 위대한 영웅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제쳐두고도 그냥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 이드라는 마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면서, 유일한 숭배의 대상이면서, 그녀가 흠모하고 연정을 품는 단 하나의 상대였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도 이드라에게 어떠한 유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젖어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

    

  마셸의 작은 오두막은 비가 오는 날이면 온통 비의 냄새와 비의 소리로 가득 차 집안 어디에서도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유리창에 하염없이 내리그이는 투명한 물줄기들을 바라보았다. 마셸은 비가 오는 날은 잠들지 않아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뿌연 증기가 오르는 찻잔 안에서는 뜨거운 찻물에 젖은 마른 꽃들이 물기를 빨아들이며 다시 한번 피어나고 있었고, 벽난로 안에서는 눅눅한 장작들이 힘겹게 스스로를 말리며 서로를 태우고 있었다. 말갛게 잘 닦인 마룻바닥과는 대조적으로 창틀 위에 내걸린 마른 허브 다발에는 뽀얗게 고운 먼지가 앉아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흩날렸다.

  “오늘 같은 날은 잠 없이도 꿈을 꿀 수 있어 좋지.”

  이드라는 체크무늬 보를 깐 동그란 탁자 위를 손톱으로 탁탁 두드리며 마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운을 띄웠다. 분명 똑같은 꽃으로 똑같은 차를 우렸는데도 여신의 앞에 놓인 잔에는 이상하게 번들거리는 보랏빛 기름 같은 것만 들어 있었다. 새까맣게 말라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꽃받침과 꽃잎들이 찻잔 속에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악몽 속의 늪에서나 날 것 같은 이상한 물거품 소리를 내뱉었다. 마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꿈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어려우니 널 알아보는 것도 훨씬 공을 들여야겠구나, 아가.”

  그렇게 뜻을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던진 이드라는 손을 뻗어 마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신의 손길은 여전히 다정하고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끝을 칼날처럼 뾰족하게 간 손톱이 그녀의 뺨을 훑고 지나가자 얕은 상처가 남았고 마셸은 따끔한 느낌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마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느리게 입을 열어 물었다.

  “저를 알아보시는 데에 공을 들이실 필요씩이나 있으신 것인가요?”

  이를테면,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마셸 리에게 이드라가 하나뿐이듯이 이드라에게 마셸 리는 하나뿐일 텐데, 굳이 무엇을 식별하고 구분할 일이 있단 말인가. 늘 같은 자리에서 이드라를 바라보고 이드라에게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사람 하나 정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거라면-그녀의 지난 인생은, 그녀가 이드라에게 바쳤던 전부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마셸은 서글픈 생각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 차로 입술을 축였다. 이드라는 그런 마셸을 바라보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었다.

  “때로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전 언제나 이드라 님의 마셸이예요. 마녀님의 마셸은 저 하나가 아닌가요?”

  이드라는 알쏭달쏭한 미소를 띠고 입안으로 끈적하고 질척한 보랏빛 액체를 흘려 넣었다. 마셸은 탐탁지 않은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희미한 비명이 여신의 입안에서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무한을 안다는 건 곧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단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일.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내부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완전한 백지상태의 사고를 가지는 것. 이상하게도 마셸은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마녀님은 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거나 아무것도 모른단 말씀이세요?”

  “이왕이면 네 마음에 드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뭐.”

  이드라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그 행동에는 어떤 기만의 의도도, 악의 어린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못을 박는 듯한 대답에 마셸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알 수 없는 좌절감과 패배감이 가슴을 할퀴었다. 마셸은 의자에 앉은 채로 불만스럽게 다리를 툭툭 떨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불경한 행동이었지만 이드라는 딱히 화를 내지도 그녀의 행동을 지적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외로 꼬고 마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기꺼이 품을 자신이 있단다. 원래 무한한 우주는 선도 악도 가림 없이 수용하니까. 하지만 네가 내게 유일해지기를 바라는 건…. 글쎄, 특별함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기대하는 방법으로는 어려울 거란다.”

  여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그녀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신에게 있어 마셸은 그저 어디에도 있을 흔해빠진 신도일 뿐, 마녀가 잠시 마셸을 데리고 놀고 애정을 주었다고 해서 마셸의 무엇이 본질적으로 바뀔 리 없었다. 마셸은 이드라의 손님일 뿐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이드라는 마셸이 완전히 풀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도 못 하는 어린 애를 어르듯 다독였다.

  “자, 그러지 말고. 비가 그치거든 시장에라도 다녀오려무나, 응? 오랫동안 시장에 나가보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잔뜩 들어오는 날이잖니.”

  “...함께 가 주실 건가요?”

  마셸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에 차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드라가 그녀와 함께 외출해 주는 날들은 상당히 드물었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답을 듣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마녀는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앞에 놓여 있던 찻잔 역시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마녀가 남긴 검고 뿌연 연기만이 축축한 집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 뿐이었다.

    

*

    

  이드라에게 거절당한 마셸은 혼자 터덜터덜 시장으로 향했다. 비가 그쳤지만 땅이 마를 만큼 좋은 날씨는 아니라 길은 여전히 질퍽한 진흙 웅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려고 하고 있었고, 시장을 방문한 손님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종일 비가 왔던 탓에 아예 그날 장사를 하러 나오지 않은 상인들도 있었고 대개는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장사를 접으려는 기색이었다.

  결국 시장을 한 바퀴 쭉 돌아보았는데도 상인들은 저마다 오늘 장사 접었다고 손사래를 치고, 비가 와서 그런가 딱히 건질 만한 물건도 없어, 시장을 나서는 마셸의 바구니에는 약초와 꽃 몇 묶음만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드라의 말대로 좋아하는 물건이나 잔뜩 사면서 기분을 풀어 보려던 마셸은 더 슬프고 처진 기분이 되어 버렸다. 딱히 새로 물건을 팔러 올 상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안쓰럽게 돌아다닌다고 해서 좋은 매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허전한 마음에 텅 빈 시장을 몇 번이나 터덜터덜 돌아보았다.

  “거기 지나가는 아가씨, 이것 하나 사 가지 않을래?”

  마셸에게 말을 붙인 사람은 그녀가 시장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지만, 거기에 앉아 있는 줄도 몰랐던 노파였다. 노파는 몸집이 다섯 살 먹은 어린애만큼이나 작았는데 밤처럼 까맣고 너덜너덜한 비단 숄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마셸은 뜬금없는 호객행위에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노파의 부탁대로 허리를 굽혀 물건들이 너절하게 널린 가판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파의 단순하고 소박한 입성과는 다르게 가판대 위에 올라온 상품들은 어느 것이나 마셸의 욕심을 자극할 만큼 훌륭한 것들이었다. 마셸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안료나 희귀한 짐승의 뼈나 아름다운 원석과 실을 엮어 만든 공예품 따위의 상품들에 홀딱 반해 버렸다.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아 아직도 넉넉한 지갑을 꺼내며 물건들의 가격을 물었지만, 노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인즉슨, 다른 물건들은 그녀에게 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가씨가 살 수 있는 건 이것 하나야.”

  노파는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손으로 둥글고 납작한 무엇인가를 마셸 앞으로 밀었다. 마셸은 황당한 눈으로 노파가 쥔 것을 보았다. 동그란 원형 고리 안에 여러 가닥을 꼰 실과 매듭이 그물처럼 묶여 있고, 작은 연수정 구슬과 까마귀 깃털 따위가 주렁주렁 매달린 난잡한 물건이었다.

  “이런 걸 어디다 쓴다고 그래요? 장식치고는 난해한걸.”

  “요즘 꿈자리가 사납지? 이건 나쁜 꿈을 잡는 덫이야. 아가씨한테 필요할 텐데?”

  늙은 여자는 마셸의 상황을 잘 안다는 듯 엉큼한 웃음을 지으며 윙크까지 해 댔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셸은 꿈을 잡는다는 행위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존중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노파는 성이 난 것처럼 홱 돌아앉으며 투덜거렸다.

  “이 늙은이가 돈이 탐나 그러는 줄 아는가? 동전 하나에 가져가. 이건 처음부터 아가씨 거였어. 아가씨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물건이라구. 나, 정말로 혼날 각오를 하고 주는 거야.”

  그런 행동들이 단순히 물건을 팔려는 흔한 상술임을 알면서도 마셸은 마음이 조금씩 동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찬찬히 고리와 매듭을 뜯어 보면서, 그녀는 그물의 얽힌 모양이 마녀의 별 문양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옥 고리에 진보랏빛 실이 칭칭 감긴 그 물건은 어딘가 정말로 그녀의 마녀를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이건 진짜로 운명적인 만남일지도 모르지, 끝내 마셸은 노파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동전 하나와 장식품을 맞바꾸었다.

   

*

  결국 그날 밤 마셸은 베개 아래에 꿈의 덫을 놓았다. 이게 정말로 의미가 있는 걸까, 마셸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그 주술적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베개가 푹신하기는 하지만 그 딱딱한 고리를 베개 아래 놓고 잤다간 다음날 목이 상당히 배길 것 같다는 잡생각만 들었다. 마셸은 억지로 눈을 감고 아주 오랫동안 꿈의 덫이라는 말이 주는 기묘한 두려움을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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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꿈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고, 매우 이상했다. 그녀 앞에 놓인 길은 좁았고, 유일했으며, 끝이 보이지 않게 구불구불 꺾여 있었다. 마셸은 그 길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혹시 다른 길이 있을지 주변을 둘러볼 수도 없게 길의 양옆을 높은 벽이 두르고 있었다. 하늘은 불타고 남은 것처럼 쓸쓸하고 어둑한 잿빛이었으며 공기는 비가 오기 직전처럼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어찌 됐건 꿈속에 들어온 이상, 시작점에만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셸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중한 방어 태세를 풀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그 수상한 노파가 파는 물건을 믿는 게 아니었어, 따위의 불평이 목으로 꾸역꾸역 치밀었지만 마셸은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돌벽과 돌길을 따라 쉬지 않고 나아갔다. 길은 길고 복잡하게 꺾여 있었지만 여러 갈래로 나뉘지는 않아,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대로 몸을 뒤로 돌려 온 길만큼을 되돌아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어쨌든 이 꿈에는 그녀가 그동안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없었다. 그러니 이 꿈마저 악몽이라 하더라도 이전에 그녀가 보았던 수많은 꿈보다는 여기가 훨씬 낫다고 단언할 것이었다. 마셸은 길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어지러운 꽃향기가 진하게 풍겨오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하늘은 점차 밝아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잿빛이었다.

  마침내 길의 끝에 도착했을 때, 주변을 두르던 벽이 끊겨 사방이 트이자 그 앞에는 마셸의 집 정도 크기나 될 땅덩이가 놓여 있었다. 땅 위에는 온통 검게 마른 꽃송이들이 깔려 있었고 그것은 꼭 비단 숄에 일어난 보풀처럼 보였다. 땅의 가운데에는 탁자나 게임판 비슷한 것이 서 있고 그 앞뒤로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마셸에게 가까운 쪽의 의자에는 이미 누가 마셸에게 등을 보이면서 앉아 있었다. 마셸은 꼿꼿하게 앉아 있는 여자의 앞쪽으로 가서 직접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은 마셸과 아주 닮아 있었다. 한쪽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는 것과 기묘한 눈빛만 제외하면 서로 완벽히 똑같은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마셸의 것과 똑같이 잘 익은 올리브색이었으나 마셸과는 다르게 눈 위로 빛 없이도 덧씌워진 보랏빛 이채가 번쩍거렸다. 마셸은 문득 그녀의 눈이 잘 깎은 자수정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셸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눈과 머리카락 외에 아주 다른 부분은 없어 보였다. 흰 머리의 마셸은 마셸을 힐끗 보고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네가 먼저 올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편하게 앉지 그래.”

  그녀의 목소리는 마셸의 것과 비슷했지만 더 엷고 더 단단했다. 마셸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빳빳한 격자무늬 종이가 깔려 있고 작은 함이 그 옆에 놓여 있었는데 무슨 게임을 하기 위한 용도인 것 같았다.

  “오늘은 웬일로 마녀님이 계시지 않네. 평소였다면 마녀님께서는 네가 여기 있게 하지 않으셨을 거야. 내가 먼저 너를 찾는 거면 몰라도.”

  흰 머리의 마셸은 심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마셸은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네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마녀님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어.”

  “아, 매번 하는 이야기. 이젠 지겨워. 그 독점욕 때문에 마녀님께서도 곤란해하시는 것 같고.”

  “매번? 나는 너를 오늘 처음 봐.”

  마셸은 너무 날 서지 않게 쏘아붙이며 흰 머리의 마셸을 몇 번이나 다시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어디서 보았다 정도의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고 그러니 마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야 할 테지만, 마셸에게 그녀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야 모르겠지, 내가 너랑 마주칠 때마다 네 기억을 먹었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건, 그건…불가능해.”

  마셸의 반박에 흰 머리의 마셸은 코웃음을 쳤다.

  “꿈속에서 말도 안 되는 게 어딨니? 그나저나 여기까지 온 김에 게임이나 한 판 하자.”

  흰 머리의 마셸은 탁자 위에 놓은 작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서로 똑같은 크기의 동그랗고 납작한 칩들이 들어 있었는데, 검은색과 흰색의 칩이 서로 구분 없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검은색과 흰색은 서로 다른 칩이 아니라 칩 하나의 앞뒷면에 똑같이 붙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리버시 게임, 할 줄 알지? 늘 하던 대로 네가 흑을 잡아, 내가 백을 잡을 테니.”

  “난 이 게임 할 줄 몰라.”

  “아, 넌 늘 그렇게 말했긴 했지. 그리고 그 말대로 매번 내가 이겼고 말이야. 어디, 오늘은 네가 이길 수 있나 볼까? 흑이 선공이야.”

  흰 머리의 마셸은 기분 나쁘게 이기죽거리면서 게임의 룰을 간단하게 설명했고, 마셸은 자신이 얌전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느새 호승심이 일었다. 마셸은 저 재수 없는 여자를 꼭 이기겠다고 다짐하며 검은 칩을 골라 쥐었다. 게임판 중앙에 검은 칩 두 개와 흰 칩 두 개가 놓이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

    

  게임은 간단했다. 상대방의 칩을 자신의 칩으로 두르면, 상대방의 칩을 자신의 칩으로 뒤집을 수 있었다. 판이 다 차거나, 판이 다 차기 전에 한쪽의 칩만 판 위에 올라와 있게 되면 승패가 결정된다. 마셸은 초반에는 제법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흰 머리의 마셸이 몇 수를 접어준 것 같은 플레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이길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었다.

  “-넌 마녀님과 무슨 사이지?”

  마셸은 상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게임에 대한 집중을 어지럽힐 수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흰 머리의 마셸은 손에 든 칩을 내려놓으며 단숨에 대답했다.

  “위대한 마녀님의 딸이자 그분과 완전히 하나 된 인간이며 여신의 첫째가는 신도, 라고 해 둘까. 뭐, 겸사겸사 이 꿈의 주인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지.”

  그녀의 답을 들은 마셸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네가 나라면, 나는 어째서 너를 느끼지 못하는 건데? 마녀님께서는 왜 너와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시는 건데? 내가 왜 최근 들어 더 자주 악몽을 꿨는지 이제 알겠어. 마녀님께서 너를 나로부터 숨기려 하셨구나. 그래서 꿈이 그렇게 꼬였던 거야.”

  “진정해. 난 너보다 아주 조금 더 알 뿐이야. 자세한 부분은 나도 잘 알지 못하니까. 내가 아는 거라고는, 오늘 마녀님이 꿈에 없으시다는 것 정도. 그래서 네가 나한테 올 수 있었던 거고-”

  흰 머리의 마셸은 여전히 태평했다. 마셸은 잔뜩 화가 나서 판 위에 아무렇게나 칩을 내려놓았다. 한 수 정도를 잘못 놓는 것 따위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네가 나라면 말이야…. 마녀님께서는 왜, 너를…나보다…”

  뒷말은 차마 스스로 뱉고 싶지도 않았다. 마셸은 고개를 푹 숙였다. 흰 머리의 마셸은 그런 마셸을 냉정한 눈으로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게임판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요컨대 왜 내가 너보다 특별 대우를 받는 것처럼 보이냐는 말인가? 글쎄. 이게 특별 대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원한다면 너도 내가 될 수 있겠지.”

  “무슨 소리야?”

  “너도 잘 알잖아, 마녀님의 수많은…‘딸’들을 본 적이 있지. 그분과 하나가 되어버려서 머릿속엔 그분 생각밖에 없는…. 그분이 아니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허수아비들 말이야. 오히려 네가 자아를 유지하면서 그분을 떠받들 수 있는 거야말로 특권이고 특혜 아닌가?”

  흰 머리의 마셸은 다음 수를 놓기 위해 한참을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럼 너는, 네가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렸다면 너는 어째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나도 잘 모르겠어. 이곳이 꿈속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알겠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왜 그분 안에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알다시피…네가 지금 망설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나는 그분과 하나인 상태가 무서웠거든.”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게임판은 칩으로 가득 차 버렸다. 후공이었던 백이 마지막 칩을 게임판 위에 내려놓자 게임은 끝났고, 흰 머리의 마셸은 게임판 위에 올라와 있는 칩의 개수를 소리내어 세었다. 검은 머리의 마셸은 혹시 그녀가 속임수를 쓰지나 않을지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웬일이야? 오늘 게임, 평소보다 훨씬 잘하는데. 무승부야.”

    

*

    

  마셸이 무승부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냐고 묻기도 전에 꿈속의 세계가 한 차례 크게 뒤흔들리며 판 위에 올라와 있던 칩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의자가 마구 흔들리다가 나동그라졌고, 바닥에 깔려 있던 마른 꽃잎들이 스산한 바람에 회오리치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셸은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이 희고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녀님께서 오셨어.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거지?”

  “화가 나셨다니, 어째서?”

  흰 머리의 마셸은 다급히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일단은 우리 둘이 만났다는 사실을 아시면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 오늘 일은 비밀로 해 두는 게 좋겠어. 너는…여기서 도망치는 법을 모를 테니 내가 가야겠구나. 안녕, 다음에 또 봐.”

  말을 마친 흰 머리의 마셸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검은 머리의 마셸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백발의 마셸은 그 자리에서 곱게 말린 흰 꽃잎으로 부서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완전히 흩어지는 데에는 삼십 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마셸이 질겁하여 부서진 꽃의 파편을 모아볼 겨를도 없이, 땅 아래에서 무엇인가 찢기고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거대한 여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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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머리 마셸이 말했던 대로, 여신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마셸은 여신이 분노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드라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리지 않고 자줏빛으로 번득거리는 시선을 마셸에게 고정한 채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뱉었다.

  “네가 내 눈을 피하려고 귀여운 장난질을 했구나, 아가.”

  여신은 마셸에게 격노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마셸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셸은 겁에 잔뜩 질려 더듬더듬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이 꿈에 있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이드라 님, 저는…저는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제가 여기 있는 건, 오늘 꿈이…이상하게 바뀌어 버려서…. 여기 오려고 그랬던 건 아니예요, 정말이에요.”

  “내가 보낸 꿈들을 죄다 사로잡아버렸으니 남는 곳은 여기일 수밖에 없지.”

  여신은 거대한 꼬리를 마셸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진한 보라색의 실로 엮은 그물이 덮여 있었는데, 그물은 여신이 빠져나오기 위해 찢어버린 것인지 군데군데 연결이 끊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마셸은 그 실이, 자신이 샀던 장식품에 묶여 있던 것과 똑같은 재질임을 깨닫고 말을 잃었다. 이드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셸과 눈을 최대한 맞추기 위해 허리를 깊이 굽혔다. 똬리가 풀리며 뱀 비늘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이드라의 눈 속에서는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이 귀여운 아가를 한입에 삼켜 버리고 싶기도 하고. 이 끔찍하게 깜찍한 반항아를 어쩌면 좋담?”

  “마녀님, 일부러 그랬던 건 정말 아니었어요. 마녀님을 다치게 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저는…시장에서 신기한 물건을 팔기에,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마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드라의 꼬리 부분을 살펴보고 엉킨 그물을 풀기 위해 허둥거렸다. 이드라는 불만스럽게 쉿쉿거리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그물보다도 자신이 다쳤을 거라고 믿는 마셸의 태도가 훨씬 불만스러웠다.

  “누가 감히 위대한 꿈의 마녀를 다치게 할 수 있단 말이냐? 누가 감히?”

  “죄송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깨자마자 버릴게요, 약속드려요. 용서해 주세요, 마녀님.”

  이드라는 마셸을 쏘아보았다. 마셸은 이드라 앞에 무릎을 꿇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열심히 용서를 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셸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싶기도 했지만, 이드라는 상당히 자비로운 마녀였고, 마셸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애정은 둘째 치더라도 핏덩이 무렵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오래 키워온 아이가 자기 앞에서 울 것처럼 비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드라는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뭐니? 그 잡상인의 꾐에 넘어간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마셸은 입안을 초조하게 잘근잘근 씹었다. 그 어떤 것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이번의 실수를 이드라에게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

    

  “마녀님이 일부러 제게 악몽을 보내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무섭고 싫었는데도 마녀님은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죠…. 그래서 나쁜 꿈만이라도 피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어쩌면 마녀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진실은 그게 다예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마셸은 결국 멍한 눈으로 잘못을 고백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마녀를 진심으로 마음 깊이 믿었다면, 여신이 그녀에게 시련을 보냈더라도 끝까지 그의 곁에 서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적어도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녀가 그녀를 돕거나 돕지 않거나, 그녀가 마녀에게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거나, 적어도 마셸만은 마녀를 믿었다면.

  “-제 모든 꿈이 당신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어요, 이드라 님.”

  이드라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인간들이 보이는 모습이 다 고만고만하다는 것을 아는 이드라로서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질투심도 많고, 욕심도 많고, 의심도 많았으며, 쉽게 겁에 질렸다. 이드라의 장난감이라고 해서 예외일 리는 없었다. 오히려 신의 사랑을 탐내는 인간인만큼 모든 면에서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좋아, 특별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마.”

  여신은 커다란 손으로 마셸의 허리를 감싸 쥐고 가볍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마셸은 이드라의 커다란 동공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본능적으로 얼어붙었지만, 여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셸의 양 뺨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다시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드라의 비늘 돋친 입술은 차갑고 미끈거렸다.

  “이제 꿈 없이 잠들도록 하렴. 오늘만 특별히 허락하마…. 다른 볼 일이 있거든.”

  마녀가 내려놓자마자 마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셸의 머릿속은 그녀의 꿈만큼이나 어지럽게 뒤엉켜 버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고, 마녀가 자신을 제대로 용서해 준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물속에 잠긴 때처럼 둔하고 멍했다. 그녀는 혼곤한 와중에 마녀의 손길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을, 자신의 몸이 까만 꽃잎 몇 움큼으로 공중에 흩날리는 것을, 몸과 분리된 의식이 갈 길을 잃고 파르르 점멸하다가 그대로 형체를 잃고 꺼져버리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너 말고, 다른 아이와도 이야기를 좀 해 보아야 할 것 같구나, 아가.”

  깊은 꿈속으로 끌려들어 가던 마셸이 마지막으로 들은 마녀의 말이었다.

    

*

    

  꿈의 마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는 검은 꽃잎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떨어진 흰 꽃잎들을 그러모아 천천히 여자를 빚기 시작했다. 달빛처럼 희고, 얼음처럼 차갑고, 꽃처럼 달콤한 그녀의 작은 장난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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